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토 고몬 (문단 편집) === 미토 고몬에 대한 역사 이야기 === * 19세기 막말(幕末)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慶喜)가 미토 도쿠가와의 먼 후손이다. 다만 고몬의 직계 후손은 아니며,[* 아래쪽에서도 언급되는 미츠쿠니의 동복형 [[도쿠가와 요리시게]]의 후손이다. 쇼군가 및 다른 [[고산케]]가 혈통단절로 인해 다른 분가에서 양자를 들이는 사례가 굉장히 잦았던 것에 비해 미토 도쿠가와가는 요리시게의 친자식인 3대 번주 이래로 요리후사-요리시게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은 채 메이지 유신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그 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요시노부 본인은 [[고산쿄]](御三卿)의 하나인 히토츠바시(一橋)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므로 미토보다는 히토츠바시 계의 일원임을 더 강조한다. * 천하를 주유했다는 일화에 가려 있지만, 학문에 힘쓰고 "[[대일본사]]" 편찬에 착수하는 등 미토를 학문의 중심으로 일구는 역할을 다하였다. 훗날 이곳을 중심으로 한 학문사조를 [[국학(일본)|미토학]](水戶學)이라 일컫는데 이를 일본사 편찬 등에서 민족주의와 국민국가 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실은 동복형이자 장자인 [[마츠다이라 요리시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번주에 올랐다. 이에 대해서는 미츠쿠니의 아버지인 [[도쿠가와 요리후사]]가 다른 고산케의 번주였던 두 형들보다 먼저 아들을 얻은 탓에 형들의 체면을 위해 장자를 서자취급하고 나중에 태어난 둘째인 미츠쿠니를 적장자로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 여부는 불명.. * 사실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을 뻔 했다. 미츠쿠니의 생모 큐쇼인은 한미한 집안 출신의 시녀에 불과한 상태에서 아이(장남 요리시게)를 잉태했는데 이것이 요리후사의 측실 사사키씨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요리후사가 가신 미키 유키츠구[* 유키츠구의 부인 무사는 요리후사의 첫 유모였던 오카자키씨의 언니였는데, 요리후사가 5살이 되던 해 죽은 오카자키씨를 대신해 요리후사의 유모가 되었고 이때의 인연으로 유키츠구도 요리후사의 가신으로서 미토 번에서 봉직하게 되었다.]를 시켜 큐쇼인의 아이를 지우도록 명했으나 유키츠구가 요리후사의 양어머니이자 이에야스의 측실인 에이슈인과 상담해 요리후사의 명령을 어기고 큐쇼인이 아이(요리시게)를 에도에서 몰래 낳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후 큐쇼인이 둘째[* 요리후사 입장에서는 3남, 장남 요리시게와 미츠쿠니 사이에는 일찍 요절한 차남 카메마루를 포함해 5명의 이복남매가 있었다.]인 미츠쿠니를 잉태했을 때에도 요리후사는 전처럼 아이를 지우도록 유키츠구에게 지시했으나 유키츠구는 이번에도 에이슈인과 상담해 큐쇼인이 미츠쿠니를 몰래 낳도록 하고 아예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숨기고 길렀다. 다만 장남인 요리시게가 미토 번에 돌아간 후에도 15세가 될 때까지 아버지 요리후사를 한번도 알현하지 못한 것에 반해 미츠쿠니의 경우 4살 때 신분을 인정받아 미토 성으로 돌아갔고 이듬해인 5살 때에는 정식으로 요리후사의 후계자로 인정받는 등 받은 대우는 완전히 달랐으며, 이후 요리시게가 3대 쇼군 이에미츠를 알현할 때에도 사실상 요리후사의 차남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다만 명목상으로는 차남취급이었지만 이후 쇼군을 대리하여 덴노를 알현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다른 고산케의 지번이 약 3~5만석 전후 규모였던 것에 비해 교통의 요지였던 시코쿠 사누키 지방의 타카마츠번 12만석을 영지로 수여받는 등 실질적으로는 거의 장남에 준하는 후한 대우를 받았다.] * 상술했듯 불행한 삶을 살았던 형을 제치고 어린 나이부터 유복하게 살며 후계자가 된 것에 대한 자책감을 꽤나 강하게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츠쿠니의 일화를 집대성한 [[겐로쿠 시대]]의 책인 '[[도원유사]]'에선 1661년, 미츠쿠니가 선대 요리후사 사후 미토 번을 계승받기 전날, 형 요리시게와 이복동생들을 불러모아 요리시게의 장남 마츠치요(도쿠가와 츠나카타)를 자신의 '''장남'''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폭탄 발언을 내뱉는데,[* 심지어 이 시기엔 이미 자신의 친아들이 멀쩡히 있었다. 즉 그 아이를 뒤로 두고 형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것.] 이를 들은 형제들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선수쳐서 '''이를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후계고 뭐고 은거하겠다.'''라고 폭탄선언해서 결국 말다툼끝에 형을 포함해 형제들 모두가 이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어느정도 작가의 입맛이 첨가된 야사지만, 실제로 미토 번주가 되기 직전은 아니더라도 미토 번주로 취임한 뒤 2년 뒤인 1663년 츠나카타를 자신의 양자로 맞이했고,[* 사실 아무리 후계자로 확정되었다곤 해도 미토 번주가 멀쩡히 있는 시점에서 후계자 문제를 독단으로 처리하긴 힘들었을테니 현실적으로 보자면 권력을 계승받고 완전히 안정시킨 2년후가 오히려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기도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이를 보면 하루아침에 나온 이야기도 아닐테니 실제로 비슷한 시점에 맹약을 나누긴 했고, 권력을 안정화시킨 뒤 그를 실천했다고 하면 야사와도 어느정도 말이 맞는다.] 심지어 츠나카타가 요절하여 본인보다 먼저 죽어버리자 아예 형의 차남인 츠나에다까지 양자로 받아들여 끝끝내 후계자로 세웠다. 어찌보면 위 일화보다 더욱 독한 모습을 보인 것. 물론 친아들인 요리츠네를 박해하진 않았고 거꾸로 그를 형인 요리시게의 양자로 보내 그의 후계자로 만들어줬다. * 고몬(黃門)은 중납언(中納言)벼슬의 중국식 표현. 실제 직무를 수행했다기보다 명예직의 성격이 강하다. 묘하게도 '''[[항문]]'''(肛門)의 [[일본어]] 발음과도 같아서 개그의 소재로 널리 활용되기도. * [[일본]]에서 처음 [[교자]], [[라멘]], [[치즈]]를 먹은 당대의 미식가로 알려져있다. * 야사이긴 한데 [[야와타노 야부시라즈]]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귀신들의 장난에 길을 잃은 적이 있다고 한다. * [[명나라]] 출신의 유학자 [[주지유]]와 친분이 있었다. 위에서 말한 미토 코몬이 처음 먹었다는 [[라멘]]도 그가 [[중국]]식 [[탕면]]을 [[일본]]식으로 어레인지해서 올린 것이다.[* 생뚱맞게 왜 갑자기 [[명나라]] 인물이 나오나 싶겠지만, 당시 [[남명]]은 실시간으로 [[청나라]]에게 당하던 시점이었고, 주지유는 남명의 구원요청을 위한 사자로서 일본에 파견되어 온 것이었다. 다만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오사카 전투|에 의해 전토가 통일된 지]] 40년도 채 안된 시기라서 내부 수습에 아직 집중해야할 시기라 지원을 보내지 못했고 조선은 [[병자호란]] 직후라, 서양 각국은 거리와 청나라의 위세탓에 쉽사리 도우려 할 수 없었고 결국 사절을 보낸 나라중 그 어느 곳도 지원을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 주지유는 남명의 미래가 끝났음을 느끼고 그대로 일본에 망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